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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배 108사찰탐방

[145] 장지산 용암사 - 보물 제93호 마애이불입상을 찾아서

by 다빈치/박태성 2015. 3. 16.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위치한 '용암사(龍岩寺)'에는 아주 독특한 마애불(磨崖佛)이

서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입니다.
두기의 마애불이 마치 부부처럼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의 마애불처럼 바위에 음각으로 파서 만든

석불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 면에 몸체를 새기고 몸체 위에는 목과 머리, 갓을 별도로 조성해서 올린 것이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미리(龍尾里)라는 지명은 광주산맥을 타고 들어온 용(龍)들이 한양에 머물렀을때 그 꼬리가 이곳에 닿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고려 초기 선종임금의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가 아들을 낳기 위해 이곳에

마애불을 만들어 놓고 공양하고 기도한 곳이라는 내용이 마애불 바위 오른쪽 아래부분에 새겨져 있어 그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 건국의 신흥 기운을 타고 불상이 거대화되고 지역별로 토속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음각 마애불에서 불상이 바위에서 독립되어 가는 과도기의

조각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불교 문화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서울 시내에서 출발할 경우 구파발을 지나 벽제 방향 → 고양동 삼거리 → 파주 방향 → 삼거리에서 좌회전

→ 용미리 방향 → 해음령고개를 넘으면 78번 국도옆에 용암사와 쌍미륵불을 알리는 안내석과 대형 입간판이 서

있습니다.

 

 

 

 

 

 

▲ 대로변에 마련된 주차장을 돌아오르면 곧바로 용암사(龍岩寺) 경내로 들어가는 일주문(一柱門)을

만나게 됩니다.

 

 

 

 

 

▲ 용암사 일주문은 원목의 상태와 화려하고 투명한 색감의 단청 상태를 보아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이 용암사의 소유는

아니지만 석불을 보기 위해서는 이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사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원래 나무의 모습인지, 바람에 의해 생긴 현상인지는 몰라도 길 양쪽의 소나무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여 그럴듯한(?) 구도를 연출해 주고 있습니다. 사찰 뒷쪽이 장지산 자락입니다.

 

 

 

 

 

▲ 용암사(龍岩寺)는 1988년 10월 전통사찰 제87호로 지정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입니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쌍석불)의 조성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사찰탐방을 하면서 절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 그 사찰의 주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었습니다만, 오늘은 숨은 보물을 찾아 떠난 탐방이기에 대한민국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부터 만나러 올라 갑니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왼편으로 50여미터 정도 높이의 나즈막한 언덕에는 석불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오르면 거대한 바위의 쌍미륵이 자태를 드러냅니다. 서울 인근에서 이토록 거대한 불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작은 산기슭에 소나무를 구름처럼 두르고 마애불이 서있습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17m 높이의

천연 암벽에 불상 둘을 조각하였는데 각각 돌갓을 쓴 모습이므로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부릅니다. 바위 면에는

몸체를 새기고 몸체 위에는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조성해서 올린 것이 특이한 점이며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으로 신체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지만 워낙 당당하고 거대한 불상이라 엄청난 힘을 느끼게 합니다.

 

 

 

 

 

▲ 석불은 두기로 보이지만 하나의 돌이 갈라진 것이고 그것을 이용해 마애불을 두 기로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석불은 둥근 돌갓 쓰고 있어 원립불(圓笠佛)이라 부르고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돌갓을 쓰고 있어 방립불(方笠佛)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2 개의 불상중에서 둥근 갓을 쓴 불상은

남자상 (미륵불)으로서 양 손에는 무언가(연꽃)를 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바로 옆에 나란히 네모난 갓을

쓴 불상은 여자상(미륵보살)으로서 두 손을 합장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상의 몸체를 만드는 수법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몇몇 예가 보이고 있는데,

안동 이천동석불상(보물 제115호)이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 주고 있으나 그보다는 세속화된 얼굴을 보여

주고 있으며 몸체의 불균형, 옷주름의 형식 등으로 볼 때 보다 후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머리 위에 갓이나 천개(天蓋)를 씌우는 것은 눈 또는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특히 유행한 석불의 형식입니다.

 

 

 

 

 

▲ 불상의 얼굴과 목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십개의 흉터가 보이는데 한국전쟁 당시 맞은 총탄 자국입니다.
불상 여기저기에 총알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대한민국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중기 13대 선종(재위 1083~1094)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씨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두 수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주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 궁주에게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 석불입상의 옆으로 난 좁은길을 따라 불상의 뒤쪽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몸체의 뒷면은 산의 지반에 묻혀 보이지 않고 따로 조성한 머리부분의 뒷면만 보입니다.

 

 

 

 

 

▲ 불상의 뒷편에서 불상의 시선방향을 바라보니 탁트인 시원한 조망이 아주 멋집니다.

 

 

 

 

 

▲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 때문인지 옛부터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요즘처럼 남자들의 존재가치가 떨어지고 남아보다는 여아 선호

사상이 높아가는 요즘에는 아마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러 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 마애석불에서 내려와 다시 용암사 절집 마당에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바라봅니다.

 

 

 

 

 

▲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용암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전각입니다.
축대는 장지산 아래 낮은 언덕을 다져 자연석을 조경한것으로, 건물은 원형 초석 위로 배흘림 기둥을

올리고 주심포를 놓은 모습입니다.

 

 

 

 

 

 

 

▲ 전면 3칸에 4분합의 빗살창호를 단장하고, 삼면을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외벽에는 금어 용정경춘(用淨鏡春)이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으며, 공포는 주심포로 단청되어 있습니다.

 

 

 

 

 

▲ 대웅보전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ㄷ"자형으로 구성하였으며 중앙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모셨고 후불벽에는 2003년에 조성된 비로자나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의 삼존불을 모시는 것이 관례인데

이 곳은 문수, 보현보살을 협시한 점이 특이합니다.

 

 

 

 

 

▲ 중앙불단의 위로 화려한 다포집의 정자형 닫집이 걸려 있으며, 2003년에 조성된 신중단과 지장단이

불단의 좌우로 배치 되어 있습니다.

 

 

 

 

 

▲ 닫집의 기둥을 자세히 보면 양쪽 기둥에 동물 형태의 귀여운 조각물이 매달려 있습니다.

용암사 대웅전의 잦은 화재를 막기 위하여 '수달'을 조각하여 놓은 것입니다.

보통은 화마를 막기 위하여 '드므'나 '해태'를 조각해 놓는 것이 보통인데, 잦은 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었던 과거를 생각해 지금의 주지 스님인 태공 스님이 화재 예방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 대웅보전의 서쪽 측면 전경입니다.

 

 

 

 

 

▲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의 물고기가 매끈하고 날렵하게 참 잘 생겼네요..^^

 

 

 

 

 

▲ 대웅보전 용마루 끝부분 용두(龍頭)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새하얀 낮달이 앵글 안에 들어 왔습니다.

 

 

 

 

 

▲ 대웅보전 앞마당 중앙에는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서 있고,

 

 

 

 

 

▲ 석탑의 기단갑석 위에는 동자승 인형들이 익살스런 동작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 대웅전 앞마당의 5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좌우 양쪽에는 아주 특별한 석등(石燈) 2기가 서있습니다.

 

 

 

 

 

▲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인근에 있는 제1군단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용암사를 방문하고
국태민안과 구국통일을 비는 '천일기도 광명등'을 각 한기씩 대웅전 앞에 세웠다고 하는데,
박정희대통령의 이름과 함께 왼쪽 등에는 ‘국태민안 위하여 천일기도광명등’, 오른쪽 등에는

‘구국통일 위하여 천일기도광명등’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 용암사 범종각(梵鐘閣)은 대웅보전 앞마당  끝부분에 있는 사방 1칸의 사모지붕 형식의 목조 건물입니다.
1984년 10월 대웅전 중수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사면은 개방되어 있고, 원형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 위로 익공식의 공포를 둔 모습으로 외관은 화려한 금단청이 시문되어 있으며, 사면에 기둥을 따라 풍각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 범종각 내부에 걸려있는 범종은 봉덕사 종을 모방한 것으로 이 범종 역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용암사를 방문하고 천일기도 광명등을 세울 때 같이 주조하여 이 종각에 봉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 범종각(梵鐘閣) 내부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입니다.

 

 

 

 

 

▲ 범종각의 동쪽 옆에 자리잡은 요사(寮舍)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식 건물로서

종무소겸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어칸에는 '퇴설당(堆雪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 요사채 앞마당 나무가지에는 새해 설날에 걸어 놓은 걸로 보이는 '새해소망등'이 미풍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 대웅보전 서쪽 산비탈에는 용암사 미륵전(彌勒殿)이 석축 위에 아담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식인 이 전각은 그야말로 '한지붕 두가족'을 연상케 하는

특이한 곳입니다. 건물 하나에 미륵전(彌勒殿)과 삼성각(三聖閣), 두가지 용도로 쓰이는 전각이기 때문입니다.

 

 

 

 

 

▲ 원래는 바로 뒷편 산 위에 있는 용미리석불입상에 기도하기 위해 지어진 전각이었는데

현재는 용도가 바뀌어서 앞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이 미륵전(彌勒殿)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른쪽은 삼성각(三聖閣)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미륵전의 바로 옆에는 칠층석탑(七層石塔)과 동자상(童子象)이 서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故 이승만 前 대통령의 모친께서 용암사 뒷산에 있는 쌍미륵불(마애이불입상) 앞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이승만 前 대통령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 1954년 이승만 前 대통령이 재임시절

용암사를 방문하고 참배하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 본래 칠층석탑(七層石塔)과 동자상(童子象)은 뒷 산의 쌍미륵불(마애이불입상) 옆에 세웠었는데

4.19 혁명 후 이를 철거하여 보관해 오다가 1987년 이 곳 미륵전 옆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이승만 前 대통령은 기독교 신자였고 생전에 친아들이 없었기에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으나 이강석은 419당시 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미륵전 옆 칠층석탑(七層石塔) 앞에서 대웅보전 앞마당쪽을 바라본 사찰 전경입니다.

 

 

 

 

 

 

 

▲ 용암사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
경기도 북부지역이라 남쪽보다는 많이 늦지만 이곳에도 여지없이 봄소식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솜털로 덮인 모양이지만 목련 꽃망울도 꽤 씨알이 굵어 졌습니다.

 

 

 

 

 

▲ 주차장 옆 공터에 서있는 산수유 나무에는 금방이라도 노란 꽃잎이 터질듯한 꽃망울이 맺혔습니다.

 

 

 

 

 

▲ 더욱 재미있는(?) 모습은 새 꽃망울과 같이 작년 가을에 열렸던 산수유 붉은 열매가

모진 바람과 추위를 견디고 아직껏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광을 받은 붉은 색 열매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며칠 후면 붉은 열매와 샛노란 꽃잎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서울 방향으로 오면서 용미리 시립묘지입구 부근에서 뒤돌아 보며

「용미리 마애이불입상(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을 최대한 줌인해 봅니다.

 

 

 

 

▲ 대한민국 보물 제93호 용미리 석불은 거의 천 년 동안 인간을 위로하고 발원을 들어주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오늘도 당당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날씨 좋은 주말에 가족과 함께 봄나들이 삼아

용미리를 방문하셔서 쌍석불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또, 석불의 눈높이에서 용미리 묘지를 바라보면서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