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북양동(주석로 80번길)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자리잡은 봉림사(鳳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멀리 서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봉림사(鳳林寺)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647년~653년) 때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정확한 설은 아니지만 전하는
대로라면 봉림사는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의 고찰이 되는 셈입니다.
절 이름은 창건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가 절 근처의 숲속에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데서
유래하여 봉림사(鳳林寺)라 하고, 산 이름도 비봉산(飛鳳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봉림사에는 숨은 보물이 있는데, 보물 제980호(1989.04.10)인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鳳林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과, 또한 불상 복장에서 <감지은자화엄경(紺紙銀字華嚴經)> 등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 사이의 각종 전적 10여종이 발견되어 보물 제1095호(1991.09.30)로
지정되었고, 이 중 <묘법연화경> 13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용주사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2014년 6월 13일 촬영)
▲ 수원역에서 오산방향으로 가다가 지하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306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대로변에 "봉림사" 방향 이정표와 "무봉산봉림사"라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 표지석이 서있는 곳에서 1.5km 쯤 좁은 산길을 오르면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납니다.
▲ 일주문(一柱門)에는 대로변 표지석과는 달리 "飛鳳山 鳳林寺(비봉산 봉림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 일주문 옆에 세워진 봉림사를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창건역사와,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과 개금시 복장에서 발견된 각종 전적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 일주문을 지나 직선으로 100여 미터 되는 곳에는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천왕문 안에는 아무런 조형물이 없습니다. 텅빈 천왕문이 당황 스럽네요.
천왕문을 지켜야 하는 사천왕님은 다 어디로 가신걸까요? 출장중이신가? ^^
▲ 천왕문을 지나 500미터 정도 오르니 넓은 주차장과 함께 봉림사 전경이 나타납니다.
비봉산 중턱의 아담한 가람 뒤로는 울창한 수풀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형국입니다.
▲ 주차장 왼쪽 언덕길을 오르면 석물로 만든 금강역사상과 함께 2층 누각이 보입니다.
▲ 봉림사 경내로 들어가는 초입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건물인 2층 누각은
윗층에는 梵鐘樓(범종루), 아래층에는 사천왕각(四天王閣)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앞쪽의 돌계단 양쪽으로는 석물로 된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지키고 서있습니다.
▲ 사천왕각(四天王閣) 내부에는 사천왕상이 있는데, 조금 전 지나왔던 천왕문(天王門)에
있었던 것을 2층 누각을 새로 세우면서 옮긴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습니다.
남주(南洲)를 수호하는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자타(自他)의 선근(善根)을 증진
한다는 뜻의 이름이며,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바른 손은 칼을 들고 있습니다.
동주(東洲)를 수호하는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치국천왕(治國天王)이라고도 하며
바른 손은 옆구리를 짚고 왼 손에 칼을 들고 천의(天衣)로 장식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경전에 따라 차이가 약간 있으나 우리나라에선 주로 왼손에 악기(비파)를 들고 있습니다.
▲ 서주(西洲)를 수호하는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는데, 우리나라에선 주로 바른 손은 허리춤에서
용(龍)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고 왼손은 여의주(如意珠)를 쥔 채 팔을 들고 있습니다.
북주(北洲)를 수호하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비사문(毘沙門)이라고도 쓰는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옹호하며 설법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문천왕(多聞天王)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왼손에는 항상 보탑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창을 잡고 있습니다.
▲ 사천왕각(四天王閣) 내부 계단 위를 올려다 보니 본법당인 극락전의 지붕이 보입니다.
▲ 사천왕각을 통과하여 뒤돌아보니 한글로 "범종루"라는 현판을 걸었고 4기의 주련에는
고려 말기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유명한 글귀가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 愛而 無憎兮 료무 애이 무증혜)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 전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범종루(梵鐘樓)는 계자각 난간을 두른 누각형태로
내부에 풍혈이 기둥 사이에 조각되어 있으며, 대형 범종을 걸수 있게끔 사각형의 이중
지지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내부에는 범종을 비롯한 불전사물이 없이 비어 있습니다.
▲ 범종루 안에서 내다보니 큰 마당 뒤로 주불전인 극락전이 액자속 그림처럼 보입니다.
▲ 봉림사 본법당인 극락전(極樂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형식의
전각으로 좌우 측면에는 면적 넓은 풍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 가구식으로 짠 화강암의 높은 축대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로 원형기둥을 두어
다포를 얹은 모습으로 조선후기의 전형적 건물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2ㆍ4분합의 교살창호를 두고 어칸 중앙에 편액과 4기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외면 전체는 단청으로 마감하였고 포벽에는 6구씩 화불(化佛)이 그려져 있습니다.
▲ 법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는 보물 제980호인 목조아미타불좌상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 極樂殿(극락전) 편액의 글씨는 평범한 서체이긴하지만 획이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 중의 하나로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으며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내부는 우물마루 위로 "ㄷ"자형 불탁을 두고 그 위로 닫집을 구성하여 전각의 이름처럼
극락정토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존불을 모셨으며, 이외에 불화로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뒤에 봉안된 1883년 조성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이 있습니다.
▲ 극락전 삼존불은 중앙에 보물 제980호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座像)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습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현재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의 목불상 가운데 대표적인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8년 불상을 새 단장하기 위하여 몸에 금칠을 할때 발견된 기록지를
통해 고려 공민왕11년(1362)때 아미타 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 졌습니다.
얼굴은 단아하고 엄숙한 표정이며, 무게 있는 몸은 단정하게 앞으로 약간 숙여져 있습니다.
오른손은 가슴 부위로 올리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모습으로 결가부좌를
하였으며, 양 어깨를 감싸 흐르는 옷과 띠매듭, 옷주름이 섬세하게 묘사된 점이 특징입니다.
▲ 1978년 불상에 개금불사를 할 때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려 후기에서 부터
조선 초기 사이의 각종 전적 8종이 발견되어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중 보존상태 양호한 대방광불화엄경, 묘법연화경, 범망경, 과주묘법연화경, 금강반야바라밀경
2부와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범총지집 1부가 있는데, 이 중 '묘법연화경' 5종 13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안상의 문제로 화성시 송산동에 위치한 '용주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 특히 담배갑보다 작은 크기의 금강경(金剛經 : 가로 7.3cm, 세로 4.5cm)은 1339년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섬세한 필치의 변상도까지 갖춘 호신용경전이며, 사리, 각종 섬유, 곡물, 구슬 등이
복장(腹藏)에서 함께 발견되었고, 그중 사리는 1979년 3층 사리탑을 조성하여 봉안하였습니다.
▲ 극락전 측면 모습입니다.
▲ 극락전 좌우 측면과 후면 등 삼면에는 벽화(심우도)를 그려 건물의 장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극락전 앞마당 중앙에는 삼층석탑인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이 서있습니다.
1978년 아미타여래좌상에서 나온 복장사리(腹藏舍利)를 봉안하여 1979년에 건립하였습니다.
▲ 석조 난간에는 세존사리(世尊舍利)를 봉안하였다고 새겨 놓았습니다.
▲ 석탑의 기단부(基壇部) 상층 갑석(甲石) 위에는 귀여운 동자승 인형들을 올려 놓았네요.
▲ 석탑 상륜부(相輪部)의 4면에도 불상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극락전 서쪽 옆에는 종무소 겸 요사채로 사용되는 봉향각(奉香閣)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요사채의 쓰임답게 앞쪽 전체는 마루를 깔았습니다.
▲ 봉림사의 사무를 보는 종무소 겸 주지실로 이용되고 있으며, 뒤편에 있는 또 한채의
요사는 공양간 겸 주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 여름 슬리퍼와 한겨울에 신는 털신이 시선을 끄네요.
▲ 단청이 되지 않은 봉향각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 요사채 옆 양지바른 곳에서 졸고 있는 백구, 역시 개팔자가 상팔자이군요..^^
▲ 봉향각 요사채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 극락전 앞마당 동쪽에 자리잡은 설법전(說法殿)입니다.
봉림사 중창 당시인 1708년에 세워진 건물을 헐고 신축한 것으로 현재 강당 겸 주지스님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으며, 옆에서 보면 "ㄴ"자 형의 건축형태입니다.
▲ 건물 내부에는 설법을 하는 강당의 쓰임답게 불탁 위로 높이 1미터 크기의 목조여래좌상을
모셨으며, 불화로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지장시왕탱,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있습니다.
▲ 설법전에서 서쪽방향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 설법전과 극락전 사이의 언덕 아래에는 감로수 약수터가 있습니다,
▲ 바위틈새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샘터인데,
한바가지 떠서 마시니 물맛이 아주 좋고 시원하여 한번에 갈증이 해소됩니다.
▲ 약수터에서 남쪽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입니다.
▲ 극락전 뒤편 서쪽 언덕, 봉림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삼성각(三聖閣)입니다.
▲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박한 맞배지붕 건물로 자연스럽게 언덕 위에 콘크리트 기단을 얹고
원형초석 위로 원형기둥을 세워 익공을 받친 모습이며, 외부는 전면에 6분합의 띠살문을 두고
삼면을 토벽으로 마감하였습니다.
▲ 내부는 "ㄱ"자형 불단 위로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하였습니다.
특히 칠성탱은 19세기 경기도 지역에서 이름을 날린 대화원 혜산당 축연과 보암당 긍법의
작품으로 홍색과 청색이 대조를 이루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양식의 특징을 보입니다.
▲ 삼성각 뒷산 위에서 내려다본 봉림사 전경입니다. 비봉산 중턱에 토축을 쌓아 터를 마련한
가람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서해바다를 조망하는 형국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곳 봉림사는 조선 후기 중창 때의 전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적으로 개축되어
옛 가람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는 용주사(龍珠寺) 다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찰답게 가람 전체에서 소박함과 정갈함을 느낄 수 있었으며, 주변 환경 역시 건물과 나무들이
적재적소에 어울리게 배치되어 있어 그야말로 편안함이 묻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숨은 보물을 찾아서 떠난 오늘의 백팔배 사찰탐방...
지금까지 경기도 화성시 비봉산 봉림사에서 <다빈치>였습니다.
'◆ 108배 108사찰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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